출시를 앞둔 전자제품의 사용자 매뉴얼은 어디서 만들어질까. 한샘글로벌에서는 인터넷이 완전히 차단된 보안 작업실, 이른바 ‘클린룸’에서 만들어진다. 검색 한 번이면 끝날 일도 이곳에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풀어야 한다. 9년째 클린룸으로 출퇴근하는 한 테크니컬 라이터의 하루를 시간대별로 따라가 본다.
AM 08:40 | 출근, 클린룸에 출입하기까지
출근 후 클린룸 밖 자리에서 업무 준비를 마친 후 클린룸 출입을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게 개인 휴대폰에 보안 스티커가 제대로 붙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보통 한번 붙여 놓으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퇴근 후에도 떼고 있진 않지만, 클린룸의 생명은 뭐다? 첫째도 보안, 둘째도 보안! 그렇기 때문에 때론 귀찮게 느껴지지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절차다.
“보안 스티커가 붙어 있단 사실을 잊은 채 카메라를 실행했다가 휴대폰이 잘못된 줄 알고 놀랐던 적이 있어요. 또 스티커를 너무 오랫동안 떼지 않은 탓에 폰에 붙여 놓은 보호 필름까지 같이 떨어져 당황했던 기억까지, 지금 생각하면 나름 재미있는(?) 에피소드이긴 한데 처음엔 많이 당황했었어요.”
보안 스티커 상태가 좋지 않아 오늘은 바꿔줄 타이밍인 것 같다. 팀장님께 새 보안 스티커를 받아서 다시 휴대폰 앞/뒤 총 4개의 카메라 렌즈를 모두 막아 주었다. 그리곤 출입증을 챙겨 몇 걸음을 옮겨 같은 층에 위치한 클린룸으로 향한다.
AM 08:50 | 클린룸에 입장, 두 번째 업무 준비의 시작
출입증을 보안 단말기에 태그하고 “탁”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면 드디어 클린룸 입장이다. 가장 먼저 PM 자리의 PC 전원부터 켠다. 꼭 팀장님이 아니더라도 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이 PM PC를 켜는 게 클린룸 내 암묵적인 룰이기 때문이다.
클린룸에서 SW 등의 자료를 받거나 고객사 피드백 입수, 데이터 제출, USB 포트 사용까지 모두 이 PC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이 PC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오늘은 팀장님이 자리를 비운 날이라 고객사 사이트에 접속하는 것까지 그의 몫이었다.
사이트에 접속해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누르면 팀장님 개인 폰으로 인증번호가 전송된다. 그걸 입력해야만 로그인 할 수 있어서 아침 일찍부터 팀장님께 연락을 드렸다. “팀장님, 인증 번호 좀….” 물론 팀장님께선 어제 퇴근을 하며 편하게 연락을 주라고 했지만 쉬고 있는 분께 연락을 드리는 게 영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다행히 바로 확인을 하고 인증번호를 전달받아서 빠르게 접속 완료!
그제서야 그의 자리에 가서 전원을 켜고 비밀번호를 입력해 PC를 켜고, 시료함 열쇠를 꺼내서 시료함을 열고 필요한 시료를 가져와 자리에 앉아 오늘의 업무 준비를 시작한다.
AM 09:00 | 꼰대 소리를 들어도 어쩔 수 없어, 보안은 언제나 철저히
업무 준비를 하는 중 클린룸 밖에서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린다. 누가 또 들어오려나 보다. 안으로 들어오려는 찰나 얼굴을 확인하곤 인사를 하기도 전에 “OO씨, 스티커 붙였어요?” 이 말이 먼저 자동으로 입밖으로 나온다. “네!”라는 대답과 함께 스티커가 붙은 폰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을 한다. 완전 신입도 아니고, 벌써 3년 차 직원에게 이런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하며 혹시나 꼰대라는 소리를 듣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긴 하지만 “그깟 꼰대 소리 좀 들으면 좀 어때? 그보다 보안이 더 중요한 걸!”
AM 09:05 | 외부 네트워크와 철저하게 단절된 환경에서
인터넷이 없는 환경에서 매뉴얼 작업을 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요즘 하고 있는 작업은 곧 출시를 앞둔 전자제품의 사용자 매뉴얼이다. 어떤 회사의 제품인지, 어떤 제품군인지 모두 비밀이다.
“이건 보안 서약서를 작성한 사람들만 아는 정보예요. 가족이나 친구는 물론, 심지어 같은 회사 동료라도 말해 줄 수 없어요.”
가끔 눈치 없이 꼬치꼬치 캐묻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면 “이거 말했다가 콩밥 먹는 수가 있어.”라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위기를 넘기곤 한다.
일반 근무 환경이라면 한 시간에도 수십 번 검색할 일이 생기는데, 클린룸에선 그럴 수가 없는 게 현실이다. 이 부분을 이렇게 지칭하는 게 맞는 건지, 안전 경고 표기가 업계 표준에 맞는지, 기존 제품에서는 어떻게 표기하고 있었는지 모든 것이 검색 한번에 해결될 일이지만, 이곳에서는 지금까지 진행했던 고객사의 과거 매뉴얼과 사내 서버에 구축된 자체 용어집과 가이드라인 등만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외부망 없이도 일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우리의 소중한 자산들이다.
사내 보유 자료만으로 해결이 안 되는 경우는 고객사에 문의를 한다. 작업 중 궁금한 부분이 있으면 정리하여 고객사에 전달하고 답변을 기다린다. 고객사의 답변이 이해가 되지 않거나 원하는 답변이 아닐 경우 몇 번이고 되물어 명확한 답변을 받아낸다. 번거롭긴 하지만 그게 가장 빠르고 정확한 방법이다.
AM 09:30 | 추가 자료가 필요할 땐 다시 밖으로
보통은 작업에 필요한 자료(최신 모델, 가이드, 공지, 표준문장 등)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미리 바깥 서버에서 모아서 고객사 사이트를 이용해 한번에 클린룸으로 보내는데, 작업 중간에 업데이트된 자료가 있거나 추가로 필요한 자료가 있는 경우 다시 밖으로 나가 사이트에 접속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문제는 이 고객사 사이트가 휴대폰으로 받은 인증번호가 있어야 로그인이 가능한데, 깜빡 잊고 휴대폰을 클린룸에 두고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휴대폰을 가지러 다시 클린룸에 갔다 와야 하는데, 솔직히 너무 귀찮아요. 몇 년째 클린룸과 바깥 이중생활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종종 이런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제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하고요. 그래도 매일 앉아 있는 시간이 너무 많은데, 이렇게라도 강제로 더 움직이는 게 건강에는 더 도움이 될 것 같긴 해요.”
AM 10:00 | 커피 타임을 이용해 외부 출입은 한번에 해결하기
클린룸을 드나들 때 피할 수 없는 게 “탁!” 하는 출입문 열리는 소리. 그래서 되도록 한번 나갈 때 밖에서 해야 할 일들을 다 해결하고 오는 편인데, 이 커피 타임이 적기다.
열심히 일을 하다 보면 항상 이 시간 즈음에 커피 한 잔이 생각나기 마련. 클린룸 밖에 나간 김에 화장실 등의 용무까지 해결하고 들어온다.
“진짜 필요에 의해서 자주 왔다갔다 해야 할 경우가 있는데, 너무 자주 왔다갔다하면 다른 분들한테 방해가 될까봐 솔직히 화장실 세 번 가고 싶은 거 참았다가 두 번만 간 적도 있어요.”
또 일어난 김에 지나는 길에 있는 PM PC에 접속된 사이트도 새로 고침하여 새 메일이 없는지 확인도 한번씩 해주고, 클린룸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이렇게 한번에 여러 가지를 해결하는 게 습관화가 되었다.
PM 12:00 | 점심시간에도 보안, 놓치지 않을 거예요
직장인들이 퇴근 시간 다음으로 가장 기다리는 것이 바로 이 점심시간. 자리를 비워야 하기 때문에 이때도 절차가 있다. 책상 위에 있는 시료는 가릴 수 있는 무언가로 덮어 놓고, 모니터의 전원까지 끈 상태로 나와야 한다.
PM 01:00 | 돌아온 자리, 또 다시 멈춰진 PC
점심시간 고작 1시간 자리를 비우고 돌아왔을 뿐인데, 돌아와 보니 PDF 주석이 또 다 사라져서 보이질 않는다. 이럴 땐 열어 놨던 PDF 파일을 모두 닫고 다시 열어야 정상 작동을 한다. 처음에 이 일을 겪었을 땐 주석이 다 사라진 건가 너무 깜짝 놀랐었는데, 이젠 놀라는 것보다 “또 그러네. 귀찮게 다시 다 열어야겠네.” 하면서 아무렇지 않게 파일을 닫았다 다시 열곤 한다.
설상가상으로 구독만료 경고 창 때문에 작업이 원활하지 않을 때도 있다. 일러스트를 열어 이미지 확인을 해야 하는데, 자꾸 경고 창이 떠서 취소를 몇 십 번을 눌러가며 확인을 겨우겨우 마쳤다. 고객사에서는 이틀 후에야 방문을 한다는데, 그때까진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하는 것 말곤 방법이 없다.
이렇게 구독만료 창이 나타나는 경우에는 고객사에 방문을 요청하고, 고객사 담당자 감시 하에 일시적으로 네트워크를 열어 재로그인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PM 03:00 | 당 충전이 필요한 타임, 보안카드 꼭 챙기기
회사의 공식적인 휴식 시간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밖에 한번 또 나갔다 다시 들어가려는데, 이런! 깜박하고 출입증을 클린룸에 두고 나왔다. 목에 매고 다니면 이런 실수는 없을 텐데, 계속 목에 걸고 다니면 목이 아파서 손에 쥐고 다니다 보면 간혹 이런 실수를 하게 된다. 이럴 땐 문 밖에서 안에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수밖에 없다.
미안한 마음으로 “똑똑” 문을 두드리고 기다리면 잠시 후 “탁!” 하고 문이 열리고, 감사의 인사를 하고 바로 자리로 가 확인해 보니, 역시나 책상 위에 출입증이 고이 놓여져 있다.
PM 04:00 | 작업 의뢰도 클린룸의 규칙대로
편집이나 이미지 의뢰 시 밖에서는 작업자들과 메일로 내용을 주고받았는데, 클린룸 안에서는 별도의 의뢰 대장 엑셀 파일에 경로를 적고 다시 바깥에 나와서 의뢰 메일을 보낸다.
QA검사의 경우도 밖에서는 QA검사 담당자들이 알아서 필요한 자료를 찾아서 참고하고 있지만, 클린룸에서는 QA검사 담당자들이 밖에 있는 자료를 TW에게 클린룸으로 보내 달라고 요청을 해야 한다. 그러면 TW가 보내고 클린룸에서 다시 받아 해당 경로에 올려줘야 하는 수고스러움이 있다. QA 담당자들은 고객사 사이트 계정이 없어서 어쩔 수가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매번 번거롭긴 하다.
데이터 납품을 요청하는 납품QA도 데이터를 올려놓고 팀장님께 따로 전달을 해야 한다. “팀장님, OO과제 국/영문 1차본 올려 놓았습니다. 고객사 전달 부탁 드려요.” 그래서 클린룸에서 작업을 하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팀장님을 찾게 된다.
PM 05:30 | 클린룸 퇴장, 두 번의 퇴근 준비
퇴근 전에도 마지막 절차가 있다. 책상 위에 있는 모든 시료를 다시 시료함에 넣고 열쇠로 잠궈야 한다는 것!
컴퓨터를 끄고, 제대로 꺼졌는지 다시 한번 확인한 후 멀티탭까지 끄고, 책상 위에 혹시라도 남아 있는 시료가 있는지 재확인한다. 그는 보안 작업실을 나서기 전 항상 책상을 한 번 더 돌아본다. “9년째 같은 방식이에요. 그게 그냥 제 일의 일부예요.”
다시 클린룸의 문을 열고 두 번째 퇴근 준비를 할 공간으로 들어선다. 클린룸에 있는 동안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메일은 없는지 체크 후 일을 마무리하고, 컴퓨터를 끄고 의자를 정돈하고 멀티탭까지 끄면 그제서야 진짜 퇴근이다.
돌이켜보면 오늘 하루의 모든 번거로움 — 스티커, 인증번호, 시료함, 닫았다 다시 여는 PDF — 은 우연이 아니다. 고객의 미출시 정보가 단 한 줄도 새어 나가지 않도록 설계된 절차다. 검색이 막힌 방의 불편함이, 곧 고객이 안심하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이유다.
검색이 막힌 방에서도 매뉴얼은 완성된다. 9년째 같은 방식으로, 매일.
하루를 채운 보안 체크포인트
- 출근: 휴대폰 앞·뒤 카메라 4개에 보안 스티커가 붙어 있는지 확인
- 입장: 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이 PM PC 전원을 켜고, 출입증을 보안 단말기에 태그
- 작업: 외부 인터넷 차단 — 사내 용어집·가이드라인·고객사 과거 매뉴얼로 검색을 대체, 막히면 고객사에 직접 문의
- 자료 반입: 휴대폰 인증을 거치는 고객사 사이트를 통해서만 클린룸으로 자료 전송
- 점심·휴식: 시료는 덮고 모니터 전원 차단, 출입증과 휴대폰은 반드시 지참
- 퇴근: 모든 시료를 시료함에 넣어 잠그고, PC·멀티탭을 끈 뒤 책상을 재확인
자주 묻는 질문 (FAQ)
Q. 클린룸(보안 작업실)이란 무엇인가?
A. 외부 인터넷이 차단된 보안 작업 공간으로, 출입증 태그·휴대폰 카메라 봉인·시료함 잠금 등 엄격한 절차로 운영된다. 출시 전 제품처럼 기밀 유지가 필요한 매뉴얼이 이곳에서 제작된다.
Q. 인터넷이 없는데 어떻게 매뉴얼을 만드나?
A. 외부 검색 대신 사내 서버의 자체 용어집·작업 가이드라인·고객사의 과거 매뉴얼을 참고한다. 사내 자료로 해결되지 않으면 고객사에 직접 문의해 정확한 답을 받는다.
Q. 테크니컬 라이터는 클린룸에서 어떤 보안 절차를 지키나?
A. 휴대폰 카메라 스티커 부착, 출입증 태그, 시료함 잠금, 자리를 비울 때 모니터 전원 차단, 퇴근 시 시료 회수 등을 매일 반복한다. 자료 반입은 고객사 사이트의 휴대폰 인증을 거쳐서만 가능하다.
📌 시리즈 안내
이 글은 한샘글로벌 “보안 작업실 시리즈” 4편입니다. 시리즈는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1편 왜 어떤 매뉴얼은 잠긴 방에서 만들어지는가
2편 보안 작업실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인프라
3편 자물쇠는 스스로 잠기지 않는다 — 보안 의식
4편 검색이 막힌 방에서 매뉴얼을 쓴다는 것 (테크니컬 라이터의 하루) (현재 글)
5편 잠긴 방에서 50개 언어를 관리한다는 것 (다국어 현지화 담당자의 하루)
6편 리테일 마케팅 작업자(카피라이터·그래픽·영상)의 하루
7편 14년, 사고 0건 — 이 모든 일이 왜 가능했나